이번 차례에서는 디지털 성폭력, 특히 교내 사건을 예방하고 건강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룹니다.
1. 지난 날의 모습들 : 디지털 성폭력 예방 교육 실태
"학생 수가 많아서 토론형, 자기 주도형 학습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 ... 인권 교육 및 성교육 내용이 형식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 (이하 생략)"
학교에서 경험했던 성폭력 예방 교육을 떠올려 봅시다. 대부분 강당 같은 곳에 단체로 모아놓은 채 강의식으로 진행하거나 잘 보지도 않는 교육 영상 하나만 틀고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가끔 나눠주는 안내장조차 다른 가정통신문들에 끼여져서 배포되거나 별다른 교육 없이 게시판에 붙여지고는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위와 같은 (디지털) 성폭력 교육에 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입니다. 특히 부정확한 내용 전달, 도덕적/형식적 내용 단순 반복, 예방 교육 자체에 대한 회의 등 지속하여 반복되어 온 전통적 교육 방법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림 1 | 현재 실행 중인 성폭력 교육이 불만족스러운 이유 - 학생 대상 설문(김경희 외 2, 2019).
(이미지 설명) 막대그래프. 부정확한 내용 전달 및 사례 부족 20.6%. 피해자와 가해자 이분법적 구분 2.4%. 사건의 과대해색 1.1%. 도덕적, 형식적 내용의 단순반복 23.7%. 예방교육 실행 시 학생 및 학교 분위기 미흡 2.7%. 제시된 예방법의 실행 불가능성 13.6%. 피해자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방식의 예방법 3.4%. 예방교육 자체에 대한 회의 16.0%. 예방교육 한계로 인한 법제도 강화 11.3%. 기타 5.3%.
이를 바탕으로 할 때, 분명히 변화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학교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직접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과정이 없다면 깊은 고민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민의 결여는 또 다른 가해와 피해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학생, 교사 등을 포함한 학교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직접 고민하고, 생각하고, 대화하여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의견을 나누는 등 디지털 성폭력 예방 교육 시간을 직접 만들어가다 보면,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사회 문제의 심각함을 체감하고 우리 주변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2. 변화가 필요한 이유 : 감추지 말아야 할 때, 떠들어야 할 때
그동안 성이 금기시되거나 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면서 음성화되어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공개적인 토론 문화를 통해 청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건전하게 해결하고, 성이 자율성과 동의에 기반한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한국 사회에서 성(Sex, 性)은 비밀스럽고 어려운 것, 부끄럽고 감추어야만 하는 것처럼 다루어져 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특히 청소년의 눈을 가려왔습니다. 말해주기 껄끄럽고, 낯 부끄럽고, 청소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때로는 올바른 피임법의 시도조차 막으려 하기도 했습니다. 성을 마치 종교의 성지나 영화 '해리포터'의 악역,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금지된 것으로 만들어온 것입니다. 감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성을 향한 호기심이 많을 시기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궁금증을 해결하려 시도하고, 대부분 인터넷을 거치다 보니 잘못된 정보를 얻을 때도 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성범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고민하고, 해결 혹은 대처 방법을 이야기 나눌 시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되려 문제를 덮고 가리기만 합니다. 학교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사건 해결보다는 학교 이미지, 학교 내 분위기를 먼저 신경 쓰며 사건을 키우지 않는 데에 집중합니다.
일부 디지털 성폭력 사례에서는 수업 시간 동안만 스마트폰을 교사에게 맡겨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는, 일차원적 대책만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소문을 막는다', '수업 시간에 벌어지는 디지털 성폭력을 막겠다' 등의 취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업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빼앗는다 해서 그 외의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막을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도 부족해 보입니다. 오히려 피해자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회복 지원과 학교 공동체의 성인식을 점검하는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요.
게다가 교내 디지털 성폭력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 등 교직원이 디지털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성폭력의 위험을 걷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성폭력 문제를 계속해서 덮어두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을 사용하다 보면, 교내 디지털 성폭력을 포함한 어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거나 재발했을 때 해당 사건의 당사자가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사건 예방과 대처, 그리고 해결 과정이 각자의 '근육'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성폭력 문제에 관해 미리 고민하고 함께 준비할수록 더 튼튼하게, 더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 사회와 그 구성원인 학생, 교직원 등 개개인이 그런 근육들을 키우지 못했다면 문제 예방과 해결 모두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에게는 당혹스러움, 두려움 등으로 침착한 대응, 건강한 일상 회복이 어려울 수 있으며, 가해자의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것'이나 '반성하며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실행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건의 목격자 또는 학교의 다른 구성원들은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피해자 지지 및 2차 가해 근절, 학교 내 문화 바꾸기 등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3. 변화를 위한 첫 걸음 :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 만들기'
학교 일선의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위한 공동체 교육(교사, 학생 포함)이 필요하다 (...) 양성평등한 학교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며, (...)
그러니 이제는 떠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을 문란하게 다루자는 이야기도, 가볍게 여기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건강하게 꺼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개적이고 건강한 토론을 통해 한국 사회의 건전하고 깨끗한 성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말하고 싶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성폭력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할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건강한 성 문화를 어떻게 쌓아나가야 할지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학생은 물론, 교사를 포함한 학교 구성원 전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디지털 성폭력 사건을 뉴스에서 접하고, 그 사건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고 마는 것은 충분히 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잠깐 일회성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고 넘기기만 해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공적인 영역에서도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예방 및 대처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렵고 시간이 드는 일이겠지만, 깊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학교 공동체 나름의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학교 구성원끼리 이야기 나눌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면, 먼저 수업 시간이나 성폭력 예방 교육 시간을 새롭게 바꾸면 어떨까요? 법에 따라 꼭 해야 해서 진행해왔던, 때우기 식의 단체 강의 교육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해보면 좋겠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학급 별로 교육을 진행하되 구성원인 학생과 교사가 함께 이야기를 이끌고, 배치된 예방 교육 강사는 방향을 제시하는 등 도움을 주는 형식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강사 초청 비용이 부족하거나 학교 여건이 안 될 경우 학생들이 직접 교육 시간을 꾸려보는 것도 좋겠죠. 핵심은 학교 구성원이 주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굳이 교육 시간이 아니더라도 학생들 스스로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대화의 자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회 (학생회 운영위원회) 차원에서 토의 행사를 마련해도 좋고, 굳이 학생회가 아니더라도 동아리나 마음이 맞는 개개인의 학생들이 직접 그런 자리를 마련해도 좋습니다. 학생들끼리 터 놓고 이야기하고, 자료를 읽어 의견을 공유하는 과정을 가질 수 있다면, 형태나 방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교직원을 초청하여 함께 떠들며 학교 공동체의 전체 집단이 공감대를 형성해갈 수 있겠습니다.
4. 나눠볼 만한 이야기 : '학교 공동체만의 자체 규정 만들기
마땅히 나누어볼 만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자리들을 시작하기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 주제를 하나 추천 드립니다. 바로 학교 공동체 나름의 자체 규정 만들기입니다. 많은 학교들이 학교 규칙(교칙)이나 학생 자치 규정, 학생 생활 규정 등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성원들이 직접 내용을 만든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학교 생활 제규정을 위한 표준안(매뉴얼)을 잠깐만 살펴보아도 내용이 대부분 학교의 규정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학교 규정을 만들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나 반대로 학교 공동체 자체의 실정에 맞는, 혹은 구성원 간 제대로 된 합의를 이끌어낸 규정을 만들어오지 못했음도 의미합니다.
특히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문제 의식이 우리 사회 전체에 자리 잡은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학교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문제를 함께 확인하고 공통된 가치관을 쌓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 공동체가 맺는 하나의 약속으로서 '디지털 성폭력 근절(혹은 성폭력 근절) 및 사건 대처를 위한 자치 규약' 만들기를 제안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학교 구성원 전체에게 적용되는 규약을 지금 바로 만들기는 어렵다면, 먼저 학생회에서 학생들 간 지켜야 할 규약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자치 규약의 내용을 직접 구성하고 작성하면서 피해자라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건 대응 절차를 마련하는 과정 속에서 피해자가 보장 받아야 할 권리를 고려하면서 그 이유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가해 행위를 예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규약 제개정 과정 속에서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학교 공동체의 지난 날을 성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규약에 담긴 예방 및 대처 방안의 내용과 의미를 전체 구성원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실제 예방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도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참고자료
김경희 외 2. (2019). "디지털 환경에서의 학생 성폭력 실태조사 및 정책개선방안 연구". 교육부. 2019년 교육부 정책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