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차례에서는 교내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학교 공동체와 그 구성원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질문 던집니다.
1. 학교가 보여왔던 나쁜 모습들
몇몇 사례에서는 피해 여학생들이 '교사들이 가해 남학생을 옹호하고 제대로 처리해 주지 않으며, 가해자의 미래만 생각한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처리과정에서 학교가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피해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도 드러냈다.
학교 공동체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은 스쿨 미투의 배경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사건 조사, 피해자 지지 및 지원, 가해자와의 분리, 가해자 징계, 공동체 문화 점검으로 이루어지는 사건 대처 과정들이 학교 공동체 속에서는 제대로 기능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물리적, 사회적 공간, 즉 좁은 학교 건물과 적은 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되려 피해자를 억압하기에 사용되기 좋은 환경입니다. 게다가 입시와 성적이 중요한 환경은 피해 학생이 가해 교사 신고를 망설이게 하거나 사건 대처 교사가 가해 학생을 옹호하려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물리적, 사회적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2차 가해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어떤 소문이라도 빨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만약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과 피해자에 관한 정보가 무심히 유출된다면 그 또한 하나의 소문으로 퍼질지 모릅니다. 이는 인터넷을 이용한 유출의 가능성이 있는 디지털 성폭력의 특성으로 인해 피해자는 2차 가해를 두려워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사건 정보 유출 등을 제대로 예방하는 절차와 방안이 마련되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학교에 신고하기를 꺼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우리 학교에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다면"
디지털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안심하고 접근할 수 있는 구제 절차와 장치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학교 공동체의 문화를 점검하고 사건 발생 시 건강한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 장치를 마련하여 피해자가 믿을 수 있는 공동체를 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성원들 간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건 대응 절차를 마련해나갈 차례입니다. 또, 마땅히 신고할 수 있는 통로(채널)이 교사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여 피해자가 신뢰할 만한 여러 신고 방법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 공동체 내의 집단이 모두 참여하는, 학생회와 교직원의 공동 디지털 성폭력 대책 위원회 및 학생회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학생 디지털 성폭력 대책 위원회 등을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징계와 처벌 위주의 대처에서 회복적이고 교육적인 관점의 처리를 위해서는 (...)
나아가 사건 절차가 단지 가해자를 징계하고 처벌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는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 처벌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가해자가 자신의 죄에 관해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허나 그 과정 속에서 피해자 보호, 피해자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지원이나, 재발 방지를 위해 사회 전체가 해야 할 공동체 문화 성찰 등 꼭 필요한 과정들이 묻혀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학교 공동체가 먼저 바뀌어야 할 때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래에서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참고하면 좋을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해드리고자 합니다.
2-1. 사건 조사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점
먼저 사건 조사 과정을 비롯하여 사건 대처 절차 전체 흐름 속에서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바로 피해자의 정보를 엄격히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건 조사가 완결되었건, 되지 않았건 피해자를 추측할 수 있는 사건 정보를 유출해서는 안 됩니다. 사건 담당자가 주변 지인이나 학급, 학교 내에 관련 정보를 흘리는 것은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피해자의 동의 없이 함부로 사건을 공표하는 것도 2차 가해입니다. 그것은 사건 담당자 혹은 단체 뿐만 아니라 학교 공동체 전체를 향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한 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누구도 같은 절차를 밟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자 보호를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사건의 노출을 원하지 않을 때는 소수의 제한된 조사 인원만 사건 조사 과정에 참여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사건 관계자(신고인 등)만을 대상으로 엄격한 비밀 조사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피해자를 향해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의 2차 가해를 예방하는 것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2-2.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기
사건 대처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학교 공동체 내에서 충분한 공감과 협의를 통해 마련한 디지털 성폭력 자치 규약에 따라야 한다는 것과 지나치게 그 규약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함께 깊이 고민한 결과이므로 좋은 의도와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완벽한 약속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생각합니다. 되려 규약의 내용에 너무 치중해서 정작 중요한 피해자의 의사를 외면할 우려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의사입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규정 혹은 규약의 내용을 적용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대화를 먼저 원함에도 규정에 담긴 '피해자와 가해자의 엄격한 분리 원칙'을 근거로 만나지 못하게 한다던지, 처벌을 원하지 않음에도 규정대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던지 등의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의 일들도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규약에도 피해자 존중의 원칙을 우선한다는 내용을 남겨놓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규약에 그런 내용이 없더라도 각자의 마음 속에 새겨놓으면 더 좋겠습니다
2-3. 공동체 차원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분 결정하기
이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기본 전제로 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봅시다. 피해자가 학교 공동체에 신고를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 사건의 해결 과정을 학교 공동체와 함께하고 싶어함을 뜻할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 공동체 혹은 내부의 사건 대책 단체는 피해자와 함께하는 해결 과정 중 하나로서 가해자에게 적절한 처분을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마땅한 징계 처분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가 경찰 등 형사 기관에 신고를 원한다면 적절한 지원을 마땅히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징계, 처벌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가해자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실천하는 일련의 과정들도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징계를 끝마치고 난 이후에는 가해자로 하여금 그런 과정들을 진행하도록 이끌어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어떤 방향과 방법을 제시할지에 대해서 학교 여건에 맞게 구성원들과의 충분한 사전 협의가 이루어져 있다면 바람직할 것입니다. 자치 규약에 한 번 관련 내용을 담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2-4.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동시에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지원 방법들도, 공동체 나름의 내면적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하였던 대로, 피해자가 학교 공동체를 택하여 신고한 것은 사건의 해결과 회복이라는 과정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일궈나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다시 되찾고 싶은 일상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먼저 들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먼저 말하기 힘들어 한다면 때로는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결심했을 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디지털 성폭력 대책 규약을 마련할 때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학교의 여건에 맞는 여러 방법들을 미리 준비해본다면 어떨까요? 또, 법률 및 의료 지원 등 학교 공동체에서 지원하기 어려운 일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을 미리 준비해둔다면 어떨까요? 여기서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할 것은, 피해자가 어떤 감정과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것을 존중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2-5. 학교 공동체의 전체 구성원이 함께 성찰하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하기
학교 공동체 내에서 디지털 성폭력이 발생했다면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개인 문제로 끝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학생, 교사, 교직원 등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고 공동체 문화를 점검해야 합니다. 디지털 성폭력을 가볍게 소비하지는 않았는지, 진지한 고민의 시간들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공동체 구성원끼리 공유하는, 혹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등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을 함께 나누며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자치 규약을 수정해야 할 것이며,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 보완하는 시간도 거쳐야 할 터입니다. 그렇게 함께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거치고 나면 더 성숙하고 건강한 학교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참고자료
김경희 외 2. (2019). "디지털 환경에서의 학생 성폭력 실태조사 및 정책개선방안 연구". 교육부. 2019년 교육부 정책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