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일, 힘든 일 투성이었던 대응 과정이 여지껏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느꼈던 감정, 힘들었던 일, 먼저 비슷한 길을 걸어본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 등을 진솔하게 담았습니다. 우리의 솔직한 기록들이 또다른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기록 - 세상은 정말로 바뀔까요?
"세상은 정말로 바뀔까?"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 활동으로 한창 바쁘던 사랑하는 친구 J와 맥주를 마시던 중 문득, J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했습니다. 그건, “세상은 정말로 바뀔 거야!”라는 희망보다는, “바뀌기는 하는 것일까?”하는 자조에 가까웠습니다.
카페의 에어컨 바람이 춥다고 느껴졌던 2020년의 한여름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당혹감에 젖은 J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교의 선생님이 학교에서 불법촬영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시기로 추정되는 때는 곧 자신이 해당 학교의 재학생이었던 때와 겹친다고 했습니다. 그 통화 이후 J는 분주해졌습니다. 그가 피해당사자로서 무엇이든 해보겠다며 직접 움직이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과 뜻이 통하는 학교 사람들을 모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J는 신출귀몰이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자취방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는데, 그 다음날엔 창원의 법정에 섰습니다. 세상에 대한 회의와 사람들의 사그라든 관심에 지쳐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섰고, 단단하게 언론을 상대했고, 사람들의 서명을 모았고, 피해자 지원 체계 마련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을 만들어 앞서 언급한 활동을 진행하며 무엇이 옳은지, 옳아야 하는지를 세상에 대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름입니다. J의 전화를 받았던 때로부터 1년이 지난 것이지요. 그 1년이 지나는 동안 지난 4월 가해교사는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렇게 우리는 <프로젝트 똑>의 ≪교내 디지털 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서두의 질문을 한 번 더 던지고자 합니다.
"세상은 정말로 바뀌었을까요?"
“세상이 바뀔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회의에 젖어 있을 수도, 한숨 쉬며 체념했을 수도, 희망에 가득 차 있을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다는 단단한 믿음을 가졌을 수도, 도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수도, 세상이 굳이 바뀌어야 하냐며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저 또한 ‘세상이 과연 변하기는 하는가’라는 회의를 품을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이 변한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 마냥 장밋빛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언가 바뀐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발화점을 넘겨 그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생각보다도 더 많은 힘을 들여야 했을지라도, <프로젝트 똑>의 사람들은 타오르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될지라도 결국 끝까지 타오르고자 했습니다. 적어도 세상이 끼얹는 찬물에 힘없이 사그라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저는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의 활동이 <프로젝트 똑>이 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의 사람들은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 할지, 어떻게 하면 더 멀리까지, 더 힘있게 목소리가 닿을 수 있을지를 고심하고 세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프로젝트 똑>은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의 구성원들이 학업과 생업을 병행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분투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대책 없는 낙관이나, “겪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해답 없는 후회를 지양합니다. 그 대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학교 내의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맞서는 실질적인 방법을 아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찾아 읽게 된 이들이 마냥 당혹감이나 무력감에 젖지 않도록, 기꺼이 움직이기를 선택한 당찬 모두를 응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특히나 학교에서의 디지털 성범죄는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일도 있습니다. <프로젝트 똑>은 기어이 ‘일어나버린’ 일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적어도 교내 디지털 성폭력 문제만큼은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지난 1년간 그야말로 온몸으로 부딪혀 알아낸 것들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담아낸 결과입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 같은 막막함을 견디어 낸 이들이 찾고 또 세운 부표이고, 그렇게 만들어낸 하나의 길인 것이지요.
세상은 아주 잠시만 눈길을 거둬도 금방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커다란 관성을 가졌기에, 변화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마찰력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와 나’가 아니라 기꺼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관성을 끊어내고 마찰력을 이겨내려면, 그렇게 변화된 세상을 온몸으로 마주하려면, 서로가 서로의 동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이 모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한다고 믿고 있다면, 혹은 그렇게 믿고 싶다면 말입니다.
여기, 세상은 결국 변한다는 믿음을 단단히 지켜준 이들이 있습니다.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의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판을 깔고 목소리를 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바뀐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다져주었습니다.
그러니 자,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경남 A교사 불법촬영 사건 대응모임>의 활동은 <프로젝트 똑>이 되어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지만, 교내 디지털 성폭력 문제는 여전히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다는 믿음이 결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어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두의 질문을 조금 달리 던져보며 글을 맺어 봅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요?"